‘내려갈 때 보았네 / 올라갈 때 못 본 / 그 꽃’(전문)

  글쓴이가 좋아하는 고은의 시 한편이다. 고은(본명 고은태高銀泰)은 1933년 우리고장 군산에서 출생하여 군산중학교 4학년을 다니다 중퇴하고 1952년 20세의 나이로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 법명은 일초(一超), 10년간 참선과 방랑의 세월을 보내며 시를 써왔다.
 
 1958년 <폐결핵>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 1960년 첫 시집 <피안감성(彼岸感性)>을 간행하였고, 1962년 환속하여 시인으로, 어두운 독재시대에 맞서는 재야운동가로서의 험난한 길을 걷게 되었다. 1983년 나이 50에 이상화(李相華)와 결혼하였고 1986년부터 <만인보>연작시(1~9권)를 발표하여 중앙문화대상을 받았다.
 
 초기 시는 주로 허무와 무상을 탐미적으로 노래하였으나, <문의 마을에 가서>를 발표한 이후부터는 어두운 시대상황과 맞물리면서 현실에 대한 치열한 참여의식과 역사의식으로 시 세계가 바뀌어갔다.
 
 1980년 5월부터 시작된 투옥, 고문, 연금은 그의 시에 커다란 영향을 주어 역사와 현실 참여를 지향하였으나 영웅주의에 물들지 않고 진솔한 삶의 내면을 그려내 그만의 독특한 시 세계를 이루었다. 그의 역사의식이 오롯이 담긴 연작시<만인보>로 시적 형상성을 얻은 뒤 장편서사시 <백두산>을 통해 더욱 빛을 발하여 노벨 문학상 후보로까지 거론되고 있다.

  이 혼탁한 물권만능주의 시대에 우리들의 고은은 어떤 생각을 하며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을까? 최근 출간된 <개념의 숲(2009.신원)>을 통해 그의 생각의 한 조각을 들여다본다.

 10여년 전 군산대학교에서 고은이 술병을 들고 강단에 올랐을 때 강의에 참가한 이들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었다. 비행기에서 마시던 술이 조금 남아서 물 삼아 마실테니 양해해 달라는 부탁이 있었지만 청중에게는 파격이었다.

  ‘나의 향락은 술에 있다. 나는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취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고백하는 고은에게 술은 무엇인가?  혼탁한 세상 공기를 마시기 싫어 한 여름에도 마스크를 해야 했던 꽁초시인 공초(空超)처럼 술에 취하지 않고는 이 혼탁한 세상을 바로 볼 수가 없는 것일까? 아니면 술에 쩔어 ‘육체가 해파리처럼 흐물흐물해졌을 때 정신이 은화처럼 반짝인다’는 시인 이상(李箱)의 말처럼 흐려진 정신의 회복을 위해서 고은도 술에 취하는 것일까?

  ‘시는 17세부터 나의 북극성이다. 시는 나에게 길을 걸어가는 자이게 한다.’는 그의 말은 그가 시를 쓰는 자세가 얼마나 진지한가를 느끼게 한다. 시가 그에게 구도적 삶을 살게 했고 그래서 나이 스물에 출가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이 40이 넘어서 까지 ‘가족은 악의 동기’라고 생각했던 그가 50이 되어 결혼을 하고 이제 ‘가족은 사회의 가장 신성한 단위’라고 생각하게 됨으로서 사유의 꿈에서 현실로 돌아와 역사적 현실을 보고 ‘만인보’를 쓰기 시작한다. 결혼이 ‘문학은 인간과 사회의 총화로서의 형상물’이라고 정의하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한때 불교에 귀의했던 고은에게 있어 종교는 인본주의적이다. ‘신이 인간을 만들지 않았다. 신은 그 무엇도 만든 적이 없다.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 신앙은 신앙하는 대상을 과장한다. 신앙은 신앙하는 자를 확대한다. 이윽고 신앙은 탐욕이다. 이 역설로부터 출발하라.’고 주장하는 그의 종교관은 신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초월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신에 대한 경외심과 맹목적인 신앙을 부정하고 인간적 가치를 요구하는 것이다. ‘천국은 없다. 지옥은 이 세계 안에 있다.’는 주장이 그의 종교에 대한 개념과 같은 지평선에 있다.

 역사에 대한 고은의 인식은 명확하다. ‘자유를 위해서 싸운 적이 없는 인간에게는 일생이 없다. 자유에 대한 책임은 자유인가?’라는 그의 물음과 ‘인간과 인간이외의 모든 생명에 대한 평등을 앞장서서 외치고 싶다.’는 절규가 그의 역사의식의 씨앗으로 자라고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 고은은 새와 배, 그리고 기차를 많이 그렸다고 한다. 왜 한평생 살아갈 집은 안 그리고 어디고 떠나는 것만을 그리느냐고 아버지의 꾸지람도 받았다지만 80을 바라보는 고은의 그림은 아직도 떠나는 것들이다. 아직도 그의 지평선에는 장마 끝의 빨랫줄처럼 온갖 떠나는 것들이 개념의 깃발로 나부끼고 있다.
 
 신과 인간에 대하여, 삶과 죽음에 대하여,  시에 대하여, 역사에 대하여, 자연과 우주에 대하여 그는 끝없이 물음표를 지평선에 띄워 올리고 있는 것이다.

  ‘행복은 철학의 지옥이고 시의 무덤이다’라고 생각하는 고은에게 환상은 아직도 그의 반려자이다. 그 환상을 위하여 고은은 외친다. ‘친구여, 정열 없는 생명보다 정열 있는 시체가 되어라’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