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성 교수

봄날 세상 어딜 내놔도 손색이 없는 이 호숫가를 걷노라면 수면을 간질이는 햇살과 싱그러운 신록, 귓불에 살랑거리는 바람으로 우리는 이내 세상을 잊고 자연에 빠져든다. 아름다운 풍광과 호수가 주는 넉넉함으로 이 호숫가 길들은 매일 걷고 또 걸어도 질지 않는다.

  내 버킷리스트에는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가 있다. 비단 나뿐이겠는가? 아마 많은 분들이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을 꼽으라면 산티아고를 비롯해서 가보고 싶은 곳을 여행한다든지, 아름다운 길 걷기를 택하리라.

산티아고 순례길 열풍이 세계를 휩쓸더니 그 영향으로 제주에 올레길이 만들어졌다. 올레길이 인기를 끌자 전국 방방곡곡에 수많은 길들이 만들어졌고, 지금도 생겨나고 있으며, 길마다 특색을 살려 별의별 이름이 붙여졌다. 군산의 구불길도 그 하나다.

  ‘길 만들기’에는 지자체뿐만 아니라 정부도 적극적이다. 2006년 환경부는 경관이 빼어나고 생태자원이 우수한 곳에 길을 조성하여 자연탐방 문화를 확산시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퇴계 오솔길, 청량산 산길, 다산 오솔길, 대관령 옛길, 관동팔경 가는 길 등을 만들었다.
2017년까지 10년 계획으로 총 2,500㎞의 길을 조성할 방침이란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09년부터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란 이름으로 소백산 자락길, 강화둘레길, 삼남대로를 따라가는 정약용의 남도유배길, 섬진강을 따라가는 박경리의 토지길, 고인돌과 질마재를 따라 백리길, 안동 유교문화길, 해파랑길 등 전국에 39곳을 선정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올해도 성주 가야길 등 8곳을 추가로 선정했다.

  이밖에 국토해양부 등 현재 도보길 조성에 관여하는 정부 부처와 기관은 모두 7곳에 이른다. 그래서인지 난개발과 예산낭비라는 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비슷한 길에 이름만 달리 하는가 하면 어떤 곳에서는 전임 단체장이 만든 길을 버리고 새 길을 조성하기도 했다.

  “여러 날 동안 바르셀로나에 머무르면서 교회와 공원과 전람회를 구경하지만 그런 모든 것들로부터 남는 것이란 람블라산 호세의 풍성한 꽃향기뿐이다.” 장 그르니에의 <섬>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그렇다. 우리는 코끝을 스치는 한 줄기 꽃향기를 위해서 길을 나선다. 길은 가끔 인생에 비유되곤 하지만 길에는 설렘이 있고, 반가움과 정겨움이 있다.

  우리들의 건강을 위하여, 자연으로의 회귀를 위하여, 역사와 문화를 배우기 위하여 옛길을 되살리거나 아무도 가보지 않은 새 길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그 길들이 정부부처나 지자체의 경쟁이나 이기주의의 산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구불길로 되돌아가 보자. 구불길은 수변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근대사의 문화유산을 오롯이 간직한 길로 많은 탐방객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다. 그런데 구불길을 찾는 많은 이들은 이 길에 연이어 군산이 아닌 다른 곳으로 나아가고 싶어 한다.

  군산은 금강을 매개로 서천, 익산과 접하고, 새만금과 만경강을 끼고 김제, 부안과 접하고 있다. 길 만들기는 군산뿐만 아니라 서천, 익산, 김제, 만경에서도 이루어졌으며, 그들 시군에도 구불길 못지않은 좋은 길들이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 하나 이어지지 못하고 각 지자체의 경계선에서 단절되고 만다. 아쉬운 일이다. 길이야 왜 없겠는가? 그러나 각 시군의 이해관계와 협조 부재로 인하여 인위적으로 단절되고 만 것이다.

 이런 ‘토막길’이 이어질 때라야 한국에도 산티아고 순례길 같은 세계인들이 찾고 싶은 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새만금 관광시대가 열린지가 언제인가? 그러나 군산, 김제, 부안에서 제작한 관광지도 그 어디에도 새만금을 관통하여 이들 3개 시군을 두루 여행할 수 있는 안내는 없다.

  작년에 환경부는 새만금지역에 대한 생태문화탐방로를 만들었다. 금강철새조망대에서 부안 곰소염전에 이어지는 길에 대한 상세한 안내와 볼거리를 제공하는 ‘새만금 길따라 아리아리동동’이라는 책자도 만들었다. 진작 이런 작업들이 진행되었어야 하는데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이제부터라도 3개 시군은 머리를 맞대고 새만금 일대에 세계에 내놓을 만한 걷기코스를 개발했으면 한다.

  길 얘기를 하다 보니 바이런의 시가 생각난다. “그녀는 아름답게 걷는다. 구름 한 점 없이 별 총총한 밤하늘처럼. 어둠에서나 빛에서나 가장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그녀의 자태와 두 눈에 담겨 있구나.” 길을 걷는 사람은 누구나 이처럼 아름다운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