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쌓인 길 위에서 세상의 소음도 가라앉는다. 가게에서 틀어놓은 아이돌 가수의 목소리도, 행인의 통화 소리도, 쌩쌩하던 도로의 경적소리도 몇 데시벨 낮춘 것 같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들을 때마다 노래에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 눈 덮인 밤을 연상하는 까닭도 이 때문일까. 촉촉한 눈송이들이 소음을 흡수하는 것 같다. 가만히 눈 쌓이는 소리와 쌓인 눈을 밟는 조심스러움만 들릴 뿐이다. 고요한 세상에 꼭 필요한 뜻만 입 밖으로, 손 밖으로 내보내야 할 것 같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걸음이 느려진다. 도로의 차들도 느릿느릿 신중하게 바퀴를 굴린다. 소리는 잦아들고, 속도는 줄어든다. 지구 중력의 1/6 이라는 달 표면에서 둔하게 뒤뚱거리던 우주인처럼 둔하게 움직인다. 아니, 중력이 커질수록 시간은 느려진다던데, 혹시 눈의 덮개로 중력이 변화한 걸까. 우리는 눈밭에서 저절로 느림의 미학을 실현하고 있지 않은가.

건널목에서는 행인도 차들도 서로 부딪치지 않게 좌우를 살피고, 기다리고, 먼저 가라고 양보를 한다. 평소의 바쁜 생활에서 그렇게 필요하다고 외치던 느림과 기다림과 내려놓음을 몸은 저절로 행하고 있다. 소복하게 쌓인 눈길을 헤치며 몸은 느려지고 마음은 가라앉으며 머리는 성찰의 길을 더듬거린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기에, 그렇게 서둘러 가려 했던가. 한 걸음이라도 빨리 가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던가. 더뎌도 다치지 않고 함께 가면 되지 않겠는가.

눈의 미덕에 홀렸던가,

옹송그리던 걸음이 순간 미끌!

뒤이어 쿵!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까지 뻗어나가던 머리를 흔들고 눈앞을 주시한다. 굼뜬 걸음도 눈길의 미끄러움을 피할 수는 없었다. 부스스 눈을 털고 더욱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긴다. 엉금엉금거리던 걸음은 고맙게도 누군가 치워둔 길에서 비로소 당당해진다. 우리가 나아갈 길을 위하여 세상 위에 쌓인 눈을 치우는데 얼마나 많은 품이 필요한가. 쌓인 눈이 녹아내리는데 얼마나 많은 햇살이 필요한가. 심지어 미국과 유럽은 이상기온으로 연일 폭설이 쏟아지고 있다. 포용과 침묵과 느림을 선사할지라도 폭설은 폭설이다.

잠시 아름다운 폭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