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곤 수필가
호수 언덕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눈길을 끈다. 무심히 지나던 발길을 멈추었다. 나뭇잎은 오색으로 물들고 시들은 낙엽은 땅에 누워 있었다. 저 생명은 누구를 닮은 삶일까.
코로나로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산책길에 나섰다. 녹음이 짙던 나뭇잎들이 점점 퇴색해 고운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우아했던 청춘이 점점 빛바랜 인생 같다. 도심을 떠나 호수에 이르니 잔잔한 은빛 물결이 평온하다. 청둥오리가 무리 지어 곡예를 한다. 다리가 긴 하얀 쇠백로가 풀잎 사이를 거닐며 기우뚱거리는 모습을 사진에 담을까 하면 날아가 버린다.
봄에 피었던 벚꽃과 조팝나무 꽃봉오리는 하얀 백설의 지상 낙원이었고, 사람들이 찾는 관광 명소가 되었었다. 뜨거운 태양열에 피어난 배롱나무 연분홍 군락은 연탄 아궁이 화로와 같았고, 언덕에 핀 들국화는 하얗게 웃고 있다. 싸늘한 기온에 잡초와 호박 넝쿨이 말없이 고개를 숙인다. 이런저런 모습들이 살아가는 나에게 묘한 감정을 일으킨다.
한참을 걷다 보니 산기슭에 우뚝 솟은 정자가 눈에 띄었다. 발걸음을 옮겨 정자에 도착하니 사방이 탁 트인 안락한 쉼터였다. 정자에서 휴식을 취한 후 호숫길을 걷다가 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였다. 나뭇잎은 빨강, 노랑, 주황, 초록, 연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검푸른 회색은 벌써 시들어 누워 있었다. 초록빛 낙엽은 아직도 청춘의 얼굴이고, 검푸른 낙엽은 내 모습 같다. 나는 연분홍빛 얼굴을 닮고 싶다. 지금 나는 어디쯤 달려가고 있을까. 인생의 황혼기이다. 자유를 찾아 방황하는 노령시대를 살아간다.
세상은 급속도로 변한다. 2030 신세대 자식과 대화하다 보면 또 다른 세계다. 노년 세대가 억압과 지배에서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하고 가슴에 묻히며 울분과 감정을 참고 살아야만 했다면, 젊은 세대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거침없이 표현하며 행동한다. 흑과 백의 논리가 분명하다. 사실에 비추어 ‘싫은 것은 싫고, 옳은 것은 옳다.'라고 말한다. 남의 눈치를 보거나 체면을 생각하지 않는다. 즉흥적이다.
그들은 공평과 정의를 사랑하고 지향한다. 미래 지향적이다. 탈을 쓴 이중적인 행동과 비합리적인 이념을 싫어한다. 이러한 감성과 열정이 넘치는 신세대들과 나는 앞으로 남은 노년을 살아가야 한다. 자식들과 지난 과거의 삶을 이야기하다 보면 이해하지 못함을 새삼스럽게 겪는다. 세상은 급변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할 시대라 상상했던 이야기가 현실로 다가온다.
나는 호수 구불길을 산책하며 새로운 희망을 보았다. 그것은 연분홍빛으로 익어가는 아름다운 삶이다. 그 꿈을 찾았고 삶의 근본을 깨달았다. 지난날의 삶은 아무 소용이 없다. 지나간 세월은 그저 흙장난이었다. 오늘 하루가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를 깨닫게 된다.
인간 생명이 노령화될수록 설 자리와 입지가 좁아진다. 마음과 의욕은 앞설지라도 몸과 마음은 각각 따로다. 병들고 아픈 몸이 되면 모든 것이 정지된다. 문제해결이 아니라 문제를 일으키는 주역이요, 역기능 현상이 발생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는 삶이다. 노년이 되면 자존심도 버리고 권위 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고집과 자기주장이 강하면 ‘꼰대’라 부른다. 그 굴레에서 탈탈 벗고 일어서야 한다. 들었어도 못 들은 척, 알아도 모른 척, 보았어도 못 본 척, ‘척’이란 단어가 눈 앞을 가린다.
노령이 되어가는 것도 서러운데 이게 웬 말인가. 자신도 의아스럽다. 그래도 눈을 뜨고 마음이 열려 변해야 한다. 부정적인 생각보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마음을 바꾸어 살아야 한다. 누구를 위한 삶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길이다. 하루 속히 고정 관념에서 깨여 행동해야만 한다. 자존심을 낮추고 다가가야 한다. 상대방을 넓은 이해와 사랑으로 포용할 때 함께 살아갈 수 있다. 교만한 삶은 구렁 속에 빠지는 죄악이었다. ‘겸손이 최고의 미덕이다.’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세월의 흐름 앞에 고개를 숙이며 나는 “내일을 향한 마지막 연분홍빛 삶을 불태우자.”라고 다짐을 한다.
군산미래신문 (kmrnews@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