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군산 출신 탤런트 김수미 씨의 안타까운 소식이 있었다. 사후에 이러저러한 뒷이야기들이 떠돌았지만, 그 중 고인을 신뢰했던 탤런트 김혜자 씨의 선행이 회자되었다. 물론 평소 누군가로부터 신뢰를 받는다는 것은 하루아침의 일로 가능하지 않다. 긴 시간 동안 누적된 삶의 태도나 방식에서 형성된 것임을 감안할 때 고인의 삶은 비교적 잘 살아낸 것이었다 짐작한다.

 젊은 날, 고인의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고인은 지인들로부터 몇백 만원씩 빌리는 있이 잦았다. 이를 지켜보던 김혜자 씨는 전 재산 20억 원이 든 통장을 고인에게 내밀며 빚을 갚는 데 쓰라고 했다. 김혜자 씨는 고인에게 ‘이 돈은 갚지 않아도 되지만 나중에 혹 여유가 생기면 갚아도 좋다’고 했다. 놀라운 일이다. 신뢰를 쌓으며 살아온 고인도 놀랍지만 부모형제도 전 재산을 내놓기 어려운 일이 아닌가. 물론 그동안 김혜자 씨의 봉사활동은 널리 알려진 바 있다. 그렇다 해도 동료의 안타까운 상황 앞에서 자발적으로 도움을 주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많은 시간이 흐를 때까지, 고인은 각고의 노력으로 김혜자 씨에게 빌린 돈을 모두 갚았다. 이 또한 쉬운 일 아니다. 인생이란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많기 때문에 도움을 받았다고 해서 그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되갚는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거니와, 행여 도움을 준 이가 도움을 받은 이에게 우월감이나 소위 흔한 ‘갑질’ 행위를 한다면 신뢰는커녕 그 관계는 유리처럼 깨지기 쉬움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예측 불허인 삶 앞에서 두 분의 신뢰는 그만큼 공고했던 것이다. 

 평가는 분명 타인의 잣대이다. 그러나 올바른 인생관과 가치관으로 생을 이어온 사람이라면 굳이 타인의 잣대를 의식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 자벌레가 한껏 몸을 웅크렸다가 웅크린 만큼 길을 가듯 자신이 살아온 만큼 살아낸 만큼의 평가는 저절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평가가 왜곡되거나 폄하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본인의 잘못이 아니다. 왜곡된 자의 눈으로 보면 만물이 왜곡되어 보일 것이며, 열등감의 발로로 상대를 폄하하기 십상인 것이다.

 변화무쌍한 세상이다. 그럼에도 인간관계에 있어서 우리가 갖춰야 할 게 있다면 으뜸이 신뢰이다. 신뢰는 개개인이 자신의 성을 쌓는 일과 같다. 나를 다듬어, 돌멩이 하나하나로 성을 쌓듯 나를 놓을 때, 비로소 단단한 성이 되는 것이다. 그때 신뢰는 나의 성 안으로 스스럼없이 들어오는 일이다. 어떤 제지 없이 뚜벅뚜벅 걸어들어오는 것이다. 성 안에서 자유롭게 산책하게 하는 것이다. 함께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 안에서 고인과 김혜자 씨는 푸른 하늘만큼 교감을 나누지 않았을까. 비록 지상에서의 이별은 막지 못했을지라도 그 푸른 하늘이 존재하는 한 그들의 신뢰는 영원하지 않을까. 이 가을, 그들의 튼튼한 성이 몹시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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